익명님께, 편지를 보내봅니다 < 문화일반 < 문화 < 기사본문
Source: http://chunchu.yonsei.ac.kr/news/articleView.html?idxno=32903 Parent: http://chunchu.yonsei.ac.kr/
SNS 기사보내기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닫기
익명으로 쓰고 마음으로 읽는 위로를 살펴보다
1천200만 부 이상 판매되며 세계적인 반향을 일으킨 소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은 과거에서 온 편지에 미래의 누군가가 답장을 보내는 따뜻한 이야기로 사랑받아 왔다. 이름 모를 타인의 고민에 응답하는 이 소설적 상상은 최근 ‘익명 편지’라는 이름으로 현실에서 구현되고 있다. 다른 시공간을 살지만 비슷한 시간을 거쳐온 이들이 주고받는 익명 편지에 관해 알아봤다.
고민에 온기를 더하는 온기우체부
지난 20일 오후 7시 방배동 ‘온기’ 사무실에는 익명 편지에 답장을 쓰기 위해 9명의 자원봉사자, 일명 ‘온기우체부’가 한자리에 모였다. 비영리 사단법인 온기는 2017년부터 익명의 고민 편지에 답장을 써주는 ‘온기우편함’ 사업을 운영하고 있다. 전국 110곳에 설치된 온기우편함에는 한 달 평균 약 2천 통의 익명 손 편지가 접수되며 답장은 통상 2~3주 안으로 발송된다.
이날 20대부터 60대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온기우체부들은 둥근 테이블에 함께 둘러앉았다. 첫 순서는 자기소개 시간이었다. 3주 전부터 온기우체부로 활동하고 있다는 김민석(25)씨는 “대학 시절 잠시 방황했지만 끝까지 믿고 격려해 준 부모님 덕분에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며 “그 경험을 바탕으로 나도 타인에게 위로를 주는 존재가 되고자 온기우체부 활동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고민을 전하는 익명의 사연자 ‘온기님’들처럼, 온기우체부들 또한 각자의 이야기를 꺼내며 서로에게 귀 기울였다. 온기우체부 활동은 수거된 편지 더미를 천천히 훑어본 뒤 그중 가장 마음이 가는 한두 개의 사연을 고르는 것에서 시작한다. 온기우체부 A씨는 “경력단절을 겪은 여성과 아이를 가질지 고민하는 부부의 편지를 골랐다”며 “비슷한 시간을 지나왔기에 엄마의 마음으로 그들의 선택을 응원하고 싶다”고 전했다. 결혼할 수 있는지를 묻는 편지를 집어 든 강민재(27)씨는 “최근 내 고민과 맞닿아 있어 그 질문이 눈에 띄었다”며 “어떤 선택을 하든 그 또한 내 삶의 일부인 것처럼, 온기님도 자신의 선택을 믿어도 괜찮다는 뜻을 전하고 싶었다”고 고백했다. 온기 조현식 대표는 “유사한 경험을 가진 온기우체부가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전달하는 것이 공감의 시작”이라며 “정답을 제시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경험을 나누는 태도만으로 온기님들에게 큰 위로가 된다”고 강조했다. 이어진 답장 작성 시간은 이따금 볼펜이 편지지 위를 오가는 소리만 들릴 뿐 내내 고요한 분위기였다.
온기우체부들은 한 시간가량 각각 2~3편의 편지에 답을 썼다. 타인의 마음을 헤아려 편지를 쓰는 과정은 온기우체부 자신에게도 위로가 된다. 이들은 답장을 쓰며 평소 자신이 듣고 싶었던 말을 자연스레 떠올리고 스스로를 다독이게 된다고 입을 모았다. 우리대학교 사회복지연구소 오유경 연구원은 “타인의 삶을 이해하고 자신의 언어로 위로를 구성하는 상호작용은 봉사자의 정서적 성장에 긍정적 영향을 준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지난 2021년부터 2023년까지의 온기우편함 성과를 분석한 ‘사회구성원 우울감 지속 완화 및 정신건강 회복의 임팩트 화폐가치화 연구’(아래 연구)에 따르면 온기우체부의 90.7%는 자신과 유사한 경험에 관한 편지에 답하며 치유받았다고 응답했다.
모임은 각자 소감을 나누며 서로에게 위안을 건네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조인태(27)씨는 “사회복지 분야에서 일하기를 희망하지만 낯을 많이 가려 처음 만나는 사람 앞에서는 말수가 줄거나 쓸데없이 말을 많이 하게 된다”며 “계속 부딪히다 보면 나아질 거라 믿고 모임에 성실히 참여하는 것부터 시도하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그의 말에 온기우체부들은 고개를 끄덕이거나 격려의 박수를 보냈다. 한양대학교 창업교육센터 겸임교수이자 연구를 진행한 ‘임팩트리서치랩’ 이호영 대표는 “온기우체부들은 활동 후 힘들 때 자신을 도와주려는 사람들이 있다는 믿음이 강해졌다고 보고했다”며 “평소와 달리 동아리처럼 모여 자발적으로 활동하는 것이 집단 상담과 유사한 효과를 발휘한다”고 설명했다.
마음 아픈 청년에게\ 마음 아팠던 청년이
연남동의 카페 ‘애몽’은 ‘익명이, 다른 누군가에게’라는 이름의 익명 편지 쓰기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참여자는 수신인을 모르는 채로 편지를 남기고 앞서 방문한 익명 발신인의 편지를 무작위로 받아 읽는다. 애몽을 방문한 손세은(18)씨는 “평소 편지 쓸 일이 자주 없어서 더 설렜다”며 “누구한테 편지가 닿을지 몰라 입시를 마친 또래를 떠올리며 내 이야기를 많이 담았다”고 말했다. 애몽 사장 김유진씨는 “누군가의 기억과 취향, 고민이 편집되지 않은 상태로 흐르고 내용이 우연히 겹치는 지점에서 익숙함이 읽히기를 원했다”고 전했다.
애몽을 찾는 손님은 대체로 청년이었다. 이들에게 익명은 가까운 사람에게도 쉽게 말하기 어려운 고민을 드러내고 공감을 구할 수 있게 하는 안전장치다. 연구에 따르면 온기우편함에 편지를 보낸 사연자들의 연령대 역시 20~29세(50.2%), 30~39세(22.7%)로 청년층이 압도적이다. 김유진씨는 “SNS 프로필처럼 항상 드러나 있는 것에 익숙한 세대에게 익명성은 자신을 증명해야 한다는 부담이 덜해 진심을 꺼낼 수 있게 한다”고 표현했다. 아날로그적 손 편지도 청년에게 큰 매력으로 작동한다. 조 대표는 “SNS와 AI가 발달할수록 인간다운 관심이 필요한 영역이 더 두드러진다고 생각한다”며 “글씨체와 내용, 말투가 한데 어우러져 단 하나뿐인 독특한 편지를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편지 자체를 특별한 경험으로 느낀다”고 설명했다.
이들이 익명 편지를 찾는 배경에는 불안이라는 심리적 요인이 내재해 있다. 온기우편함이 수거한 편지 속 고민은 취업 어려움·막막함(17.1%), 진로 설정 어려움 및 꿈 부재(15.5%), 연애 및 이별(11.4%), 실직 및 직장 내 어려움(9.6%) 순으로 연구에서 나타났다. 조 대표는 “최근에는 정서적 고립과 우울감을 호소하는 청년들의 편지가 많아졌다”고 밝혔다. 질병관리청이 발표한 ‘2023 국민건강통계’에서 청년의 우울감 경험률은 각각 19~29세(16.3%), 30~39세(11.6%)로 나타났다. 지난 2019년 이후 다른 연령대에서는 우울감 경험률이 감소하고 있는 데 반해 청년층에서는 각각 3.3%p, 4.2%p 증가해 그 심각성을 방증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청년기 우울증 환자는 2014년 약 11만 명에서 2023년 36만 명으로 10년간 225%의 가파른 증가율을 기록했다.
우리대학교에서도 재학생들의 지친 마음을 보듬고 서로의 일상에 작은 위로를 전하고자 익명 편지 프로젝트를 기획한 바 있다. 고등교육혁신원 워크스테이션 ‘토닥토닥’ 팀은 지난 2023년 봄부터 2024년 겨울까지 학생회관 앞 우체통과 SNS를 통해 익명으로 고민을 접수하고, 이에 답하는 프로젝트 ‘연애편지’를 진행했다. 토닥토닥 팀장을 맡은 김범서(행정·19)씨는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유행 당시 온라인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며 적나라한 우울과 혐오를 접했다”며 “진심 어린 공감을 해주는 사람이 단 한 명만 있어도 누군가의 인생을 바꿀 수 있다는 신념 아래 프로젝트를 기획했다”고 전했다.
첫 달 한 통에 불과했던 편지는 2년간 130통으로 늘어났다. 연애편지에 고민을 보냈던 B씨는 “답장 속 ‘버릇을 고치고 싶다는 마음가짐부터가 하나의 성과’라는 위로에서 눈에 보이는 성과만을 좇는 태도에서 벗어나 조금은 여유를 회복할 수 있었다”는 후기를 남겼다. 김범서씨는 “‘연(Yon)애(愛)’라는 이름처럼 ‘여기 어딘가에 나를 응원하는 사람이 있다’는 공동체적 연대감을 북돋고 싶었다”며 “내 고민이 담긴 편지를 누군가 읽고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 답장을 써준다는 것 자체가 따뜻한 관심”이라고 표현했다.
익명의 위로가 \ 공공의 돌봄으로
대학가와 지역사회를 중점으로 익명 편지는 확산하고 있다. 한양대학교는 지난 2025학년도 2학기 사회봉사 교과목에 ‘온기 손 편지 답장 봉사활동’을 개설하며 대학 교육과정 안에서의 정서 돌봄을 설계했다. 충청남도는 지역맞춤형 자살예방사업의 일환으로 도청 본관에 제1호 온기우편함을 설치했고, 올해 3월부터 도내 32개 대학교로 늘릴 계획이다. 조 대표는 “온기우편함이 안정적으로 운영될 수 있는 구조를 구축하고 온기우체부 간 교류를 지원하는 체계를 마련하고자 한다”며 “이러한 모델을 전 세계로 확산해 누구나 운영할 수 있는 익명 편지 플랫폼으로 발전시키는 것이 목표”라고 밝혔다.
편지를 전하는 대상은 점차 확대되고 있다. 지난 2025년 11월 ‘2025 연세-넥슨 √i RC 창의플랫폼 공모전’ 최우수상을 받은 고등교육혁신원 워크스테이션 ‘EMOya!’ 프로젝트는 소외된 아동·청소년을 어른과 연결하는 익명 편지 서비스 플랫폼을 개발했다. ‘병아리’로 불리는 학생들은 필요할 때마다 어른 ‘꼬꼬댁’에게 조언을 구할 수 있다. 성인은 봉사자로 참여하기 위해 위험성 평가와 빅 파이브 공감 능력 테스트를 통과해야 한다. EMOya! 프로젝트를 총괄한 강문정(ECON·25)씨는 “기존 학생 상담은 일방적으로 상담가가 지정돼 진정성이 떨어진다”며 “특히 학교 내 낙인을 우려해 자신의 이야기를 밝히기를 주저한 학생들에게 맞춤형 어른이 연결될 필요가 있다고 여겼다”고 그 취지를 전했다.
익명 편지는 극단적 선택을 암시하거나 심한 우울 증상이 의심되는 고위험 사례를 조기에 포착하고 적절한 지원으로 연계하기 위한 자료로 활용된다. 임 대표는 “온기는 편지로 청년들의 우울감을 완화하는 기능을 넘어 고위험군을 선별해 전문 심리상담사와 지역 정신건강복지센터로 연계하는 ‘게이트키핑’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연구에서는 고위험 사례로 분류된 편지가 25건 집계됐으며, 온기우체부의 답장이 극단적 선택을 하지 않게 된 결정적 계기였다고 응답한 사례도 있었다. 이는 익명 편지가 모니터링뿐 아니라 실질적인 예방에도 효과가 있음을 보여준다.
수집된 편지는 청년 정신건강 위험 예방 모델을 구체화하는 데도 쓰인다. 지난 2025년 12월 24일 온기는 재단법인 ‘청년재단’과 ‘예방 중심 청년정책 기반 마련을 위한 업무협약(MOU)’를 체결하며 우울과 정서적 고립이 심화하기 전 선제적으로 대응하는 체계를 제안했다. 오 연구원은 “전문 상담이나 치료처럼 긴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비교적 빠르게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청년들에게 다가갈 수 있다”고 평가했다.
“요즘은 하고 싶은 일도 없고 좋아하는 일도 없고, \ 그렇다고 새로운 무언가를 찾아 도전하자니\ 또 귀찮아서 무기력하게 \ 하루를 살아가는 것 같아요”
“‘하고 싶은 일도 없고, 좋아하는 일도 없고’라는 \ 글 앞에는 ‘요즘은’이라는 글자가 있었고, \ ‘무언가를 찾아 도전하자니 또 귀찮아서’라는 \ 글 앞에는 ‘새로운’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어요.
이는 곧 ‘요즘’이 아닌 다른 시점에는 \ 하고 싶은 일 혹은 좋아하는 일을 알고 계셨고, \ 도전 또한 해보셨다는 뜻으로 \ 이해가 되었어요…….
적어도 온기님께서 이 상태가 \ 유한할 것이라고 믿으신다는 생각이 \ 무의식중에 담겼다고 생각해요.”
- 『온기우편함』의 「고민편지 열」 中 -
\ 익명 편지는 발신인과 수신인 모두의 솔직함이 모이는 자리로 누구나 마음속 고민을 거리낌없이 적을 수 있다. 편지의 끝맺음은 늘 다정함이다. 김유진씨는 “‘당신이 행복하길 바라요’, ‘어디서 어떤 일을 하고 있든 전부 괜찮아요’처럼 마지막 문장에는 누군가의 안온을 비는 진심이 담겨 있다”고 회상했다. 그 따뜻한 마음이 다음 도약을 위한 용기이자 상대를 헤아리는 배려로 이어지기를 바란다.
글·사진 이유민 기자\ muna_iyou@yonsei.ac.kr
이유민 기자 muna_iyou@yonsei.ac.kr
저작권자 © 연세춘추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알쓸문잡] “사장님, 두쫀쿠 있나요?” 두바이 쫀득 쿠키 유행이 지나간 자리
우리대학교, 2026학년도 학부·대학원 등록금 2.6% 인상해
[알쓸문잡] “사장님, 두쫀쿠 있나요?” 두바이 쫀득 쿠키 유행이 지나간 자리
더보기
닫기
닫기
내 댓글 모음
닫기